피터슨 교수의 대표작입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분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티브이에서 패미니스트들과의 논쟁으로 유명한 보수주의자로 분류됩니다. 제목 그대로 책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며, 각 법칙으로 이루어진 12개의 쳅터가 주 내용을 이룹니다.
그가 제시하는 인생의 법칙들은 사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WASP 가 전통적으로 중요시하던 것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강함, 정직, 성실, 도전과 같은 것들이죠. 사실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념입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강조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피터슨 교수의 이 저서는 대체적으로 최근의 트렌드라고 볼 수 있는 공격성과 경쟁에 대한 반대, 그리고 결과적 평등 지향에 대한 반론으로 보입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전통적 가치를 간과하는 이데올로기적 믿음에 저항하는 내용이죠.
그는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를 되살리고 개개인이 성실한 삶을 영위함으로서 전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 성취가 어떻게 사회 전체에 대한 발전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하여 언급을 피합니다. 그 역시 그가 이와 같은 논리적 연결 고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심리학자이기 때문에'라는 묘한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합니다. 그는 마치 정부 실패를 비판하는 자본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손'의 실패는 외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성실한 개개인이 모인 사회는 집단적 문제에 성실하게 대응할 것이라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개인이 모인 사회가 행하는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히 목격하였고, 이에 대한 서술은 차고 넘치도록 많습니다.
피터슨 교수는 비슷한 맥락에서 아우슈비츠와 구소련의 수용소에 대하여는 반복적인 비판을 행하지만, 인디언 학살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에 기독교 사회가 가한 비극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학살이었고, 그 학살에 가담한 이들은 자신과 개인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을 것입니다. 마치 아우슈비츠의 독일군처럼 말입니다. 그는 한쪽의 폐해는 강조하지만 반대쪽의 폐해에 대하여는 언급을 피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의 말마따나 강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면, 그는 유대인의 약함을 문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식 철학, 그리고 기독교적 인본주의가 무너지고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하이데거가 주장한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다분히 전통에 대한 옹호를 위하여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터슨 교수는 기독교적 인본주의와 당위적 철학이 무너진 상태에서 인간이 삶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하여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찾으라고 설득하지만, 실존주의는 삶의 무의미를 스스로 인정하고자 했던 철학입니다. 저는 이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구식 팽창주의에서 문화상대주의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당위적 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따른 혼란은 서양인들에게 더 큰 충격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선과 전통적 가치가 부정되는 사회들을 긍정하기 위하여 가치관에 대혼란을 겪은 것이죠. '상대주의' 는 결국 진짜로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편리한 결론을 이끌어 냈으나, 이것이 삶의 지침이 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는 서양문물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랬듯이 천민자본주의적 특성을 드러냈습니다. 가치가 혼란해지면 그 자리는 '힘'이 차지합니다. 옳고 그름으로 서열을 메길 수 없다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본래 총칼뿐이죠. 하지만 근래는 또 다른 특성을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힘의 논리에 대한 반론으로, 전통적 가치에 대한 부정으로, 20세기의 끔찍한 공격성에 대한 극단적 폐기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교수의 주장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삶의 지침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분명히 그의 말처럼 인간은 아직 동물이고, 우리가 가진 전통적 가치와 삶의 방식은 지금과 같이 '적폐'로 팽개쳐져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그의 기독교적 전통적 가치의 회복에 대하여 반대하는 바이나, 그의 열두 가지 법칙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열두가지 법칙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가 당위적 선을 제시하지 못했다거나, 개인적 선이 어떻게 전체적 옮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우리 사회에 제동을 걸고자 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대안의 제시, 유토피아적 미래관에 대한 제시까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평가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언제나 극단을 경계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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