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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천 개의 파랑, 천선란

by 읽고보고맛보고 2021. 11. 28.

한국에서도 SF소설이 부흥하는 날이 오는군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성공에 힘입어 한국의 SF소설들이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습니다. 물론 김초엽 작가가 시초라고 할 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젊은 한국 작가의 SF소설들이 이렇게 계속 발간되고 사랑받고 있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한국형 SF소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전 SF소설들과 매우 다릅니다. 과거의 SF소설들이 'Science'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요즈음의 SF 소설은 'Fiction'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망이라는 소감을 적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SF소설을 편협하게 생각했는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에서 시작한 과거의 SF소설들에서 이야기는 작가가 상상한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망원경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의 테드 창의 작품들도 유사합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같은 작품도 핵심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언어를 이해하는 외계인의 기발한 설정이었습니다. '이해'조차 만약 우리가 엄청난 지능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상상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죠. 이런 기조는 판타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같은 작품도 톨킨이 창조한 오크와 엘프, 악의 근원 같은 것들이 이야기보다 우선합니다. 물론 위의 작품들의 이야기가 별거 아니라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야기의 놀라운 전개에 더 감탄했는지, 아니면 작가가 풀어낸 놀라운 세계에 더 감탄했는지의 문제겠죠.

그래서 저는 요즈음 한국의 SF소설에도 똑같이 작가가 풀어낸 놀라운 세계를 보고자 했었지만, 사실 그것은 저를 만족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주목했던 것은 이야기였어요. SF소설도 '소설'이니까 Science는 그저 배경일 뿐이죠. 이야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할 수 있는 겁니다. 그 과학적 상상력이 별거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부분에 더 감탄했는지의 문제일 겁니다. 사실 이 경우, 감탄이라기보다는 재미를 느낀 요소겠죠.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의 주변에 있을법한 인물들을 내새웁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장과 화해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주 치열한 고민과 깊이가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따뜻하고 동화적인 측면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 있게 써 내려간 이야기라는 느낌이 듭니다. 중반을 넘어서 마지막으로 달리는 동안 작가가 신이 나있다는 것이 독자에게 조차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작가가 고통스럽게 끌고 간 소설은 2/3 지점에서부터 뭔가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고는 하기에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이런 내달리는 힘은 더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작가의 첫 작품도 아니고, SF소설이라는 주제를 붙잡고 거기서부터 차곡차곡 써 내려간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작가가 필력이 대단하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옛날 사람인 저는 아직도 진짜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는 SF소설이 한국에서 나오는 날도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