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랑에 대한 소설적인 해설서입니다. 알랭 드 보통 같은 작가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사랑을 해설한다면, 김연수 씨는 참으로 그답게 사랑에 대한 해설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종족 번식을 위하여 이성을 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성을 탐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은 지속되어 왔겠죠. 하지만 당연히 이성을 더 탐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육 능력 또한 갖춰야만 하죠. 물론 성적 매력 역시 중요합니다. 성적 매력을 갖춘 개체와 자손을 만들어낼 경우, 성적 매력을 갖추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당연히 그 자손 역시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유전자를 남기게 되겠죠.
이 과정에는 설계자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성적 매력이 높은 개체를 원하도록 진화된 것이 아니라, 성적 매력이 높은 개체를 원하는 유전자가 많이 살아남도록 되어있는 것이니까요. 누구도 자신의 유전자가 널리 퍼질 것을 목적으로 배우자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인간은 문화와 유전자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진화하고 있으니까요. 성에 대한 갈망은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본능입니다. 새로운 이성을 탐하는 마음은 호르몬의 작용이죠. 이 책에서 진우가 말하는 그런 두근거림입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어떤 것이죠. 이는 수많은 과학적 증거들이 증명하듯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적응적 동물이라서 반복되는 자극에는 반드시 적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우의 말처럼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 단위의 양육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습니다. 협업을 통한 공동생활을 수행하고 가장 기본적인 분업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가족 공동체를 통하여 고독을 극복하고 위기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합니다. 이 가족 공동체와 이성에 대한 사랑을 연결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가족 공동체가 제공하던 모든 것들을 제공할 수 있기에 기존과 같이 가족 공동체를 통하여만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그 출발점인 이성 간의 사랑과 자유연애를 강조하게 되었죠. 진우의 대사처럼 처자식을 등에 지고 일터로 나아가는 가장을 만들기 위하여 낭만적 사랑이 발명된 것은 아니겠지만, 가족 공동체의 유지에 사랑 이외의 목적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육아가 가족 유지의 최후의 목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낭만적 사랑과 자유연애는 이제 자본주의의 거대한 사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기 위하여 하는 소비는 엄청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으면 거리에 얼마나 많은 상점들이 사라질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계속해서 포장됩니다. 자유연애는 더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운명적인 내 짝을 찾아 헤매도록 강요받습니다. 급기야 이제 우리는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을 영원하게 여기고, 영원토록 심장이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도 심장이 뛰는 다른 상대를 갈구하기도 합니다. 심장이 뛰지 않는 관계, 더 이상 사랑의 호르몬을 분비시킬 수 없게 된 관계에 점점 더 부정적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영원한 사랑' 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영이의 대사처럼 좋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죠.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상대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진수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메는 방식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가 제공할 수 있는 것들, '영원한 사랑' 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달린 문제겠죠.
광수는 아직도 선영을 바라보면 가슴이 뛸까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대던 그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행가방을 받는 그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선영이는 광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광수보다 진수를 볼 때 더 심장이 뛸 겁니다. 더 행복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선영이는 광수를 사랑합니다.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0) | 2021.09.20 |
---|---|
명상 살인, 카르스텐 두세 (0) | 2021.08.25 |
딸에 대하여, 김혜진 (0) | 2021.08.15 |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0) | 2021.08.15 |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0) | 2021.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