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생리적 거부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과장된 인물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소시오패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것 같습니다. 공감능력의 부재 그리고 욕망, 특히나 소유욕의 부재. 그 두 가지가 가장 독특한 주인공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설명한 그 주인공의 시선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주인공의 시선으로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님. 이상한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여자들. 편의점의 직원들이 험담을 하면서 우애를 다지는 모습.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챌 때마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들.
작가는 우리가 얼마나 '평범하지 않음'을 거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다름'을 배척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일본 작가가 쓴 일본 사회의 모습이지만, 우리 사회를 포함한 다른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은 본능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잠재적 위험을 느낍니다. 그것에 대한 공포는 어둠에 대한 것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배척은 아마도 어두운 곳에 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불을 밝힌 그곳에 무서운 광경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둠보다는 그것이 낫다고 우리는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이 작품에서 여동생이 주인공에게 울면서 호소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지시를 내려주면 아무래도 좋아. 확실하게 가르쳐줘."
주인공은 편의점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그것으로 정의하고, 또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를 직업으로 정의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개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활동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침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한 사람이란 존재가 그저 하는 일로 정의될 수 있을까요? 인생의 거대한 담론에 대하여 아무런 고민 없이 직업적 현실-'편의점'의 계산대-에 '할 일'을 위탁하는 것을 긍정해도 되는 걸까요?
'사무실 문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인생의 거대한 담론에서 도망쳐서 '카페인'으로 각성되어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삶은 결국 '편의점'에서 진행되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지 모릅니다. 다양성과 자본주의는 결국 우리에게 고민 없이 하루를 보낼 '사무실'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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