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다만 그는 이야기를 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책에서 의미를 읽어냄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언제나 소설은 소설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3편이면서 한 편인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이야기인 '잠겨있는 방'에서 저자는 앞서는 두 이야기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 이 결국 같은 이야기이며 각기 다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유리의 도시'가 스스로의 정체성의 문제라면, '유령들' 은 혼란된 정체에서 발현되는 피아 의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잠겨있는 방' 은 팬쇼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저자의 피아 의식과 동일시와 구별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다시 팬쇼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유리의 도시' 는 퀸이라는 인물을 내 새워서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퀸은 스스로 퀸임과 동시에 스스로 창조해낸 퀸과 괴리된 추리소설 작가 윌리엄 윌슨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추리 소설의 탐정 역인 맥스 워크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과 스스로를 괴리시키고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것이 그가 그의 본질인 퀸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접한 전화로 폴 오스터가 됩니다. 그가 사립탐정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다른 인물이 됩니다. 그리하여 퀸은 서로가 동일시되지 않는 4명의 인물이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는 피터 스틸먼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피터 스틸먼이 되면서 동시에 헨리 다크가 됩니다. 결국 퀸은 윌리엄 윌슨, 맥스 워크, 폴 오스터, 피터 스틸먼, 그리고 헨리 다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결국 퀸은 퀸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피터 스틸먼과 헨리 다크의 연구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어떤 언어는 동시에 상반되는 두 가지, 아니 때로는 수 가지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결국 퀸은 동시에 서로 해리된 여러 인물이 동시에 됩니다. 퀸이 본래 퀸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인격을 연결하는 것은 오직 빨간 노트뿐입니다.
그리고 이 헨리 다크와 피터 스틸먼이 자살하게 됩니다. 폴 오스터는 그 이름의 진짜 주인을 마주치게 됩니다. 윌리엄 윌슨과 맥스 워크는 그의 아파트와 함께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퀸이 남은 걸까요? 정말로 남은 것이 있는 걸까요? 결국 빨간 노트를 남기고 퀸은 사라집니다. 그는 온전한 퀸으로 남은 걸까요?
퀸이 사라진 이 장면은 마치 팬쇼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팬쇼는 더 알기 쉬운 의미에서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떠돌았고, 글을 썼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팬쇼는 그 모든 것에서 해리된 정체성을 손에 넣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팬쇼의 단계를 '유리의 도시'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유령들' 은 피아식별과 나와 타인의 분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감시하는 사람이 나를 감시하며, 내가 읽는 책이 타인이 읽는 책과 다름 아닙니다. 결국 나와 타인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비로소 나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타인인지 경계가 무너지면 더 이상 나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저자가 팬쇼를 찾아 피터 스틸먼과 마주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팬쇼는 모든 정체성을 떠나갔고, 그의 행보는 조사할수록 고정되지 않습니다. 결국 저자는 피터 스틸먼과 팬쇼의 경계를 명확히 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팬쇼는 아무도 아님과 동시에 모든 인간이 됩니다. 하지만 '유령들' 이 그 극단으로 치달아간 반면에 저자는 고통을 통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라는 것은 과거의 연장선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임을 지탱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나였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나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닌 어떤 것도 될 수 있으며, 또한 나조차 될 수 없습니다.
오스터는 이 모든 연장선이 우연임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어떤 현실도 의도와 무관하며, 그 우연에 의하여 나와 나의 과거는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제의 나와 같은 나임은 매우 우연적인 일이며, 현재는 현재 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미래, 또는 미래의 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실존주의 철학은 우리와 삶의 괴리에 대하여, 그리고 그 화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오스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적으로 설명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야기는 그 화해에 대하여 서술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는 계속되고는 합니다. 저자가 결국 팬쇼의 노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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