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올해 몇 살이지? 33살? 34살? 그렇다면 아직 중반부로 진입하기 시작할 즈음이로군. 아 미안하네. 생각해보니 내가 계속 반말로 말하고 있군. 내게 자네는 너무 익숙한 사람이라 그렇게 되고 말았네만,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네. 하지만 자네는 이런 건 개의치 않는 사람이지. 오히려 이 정도로 연장자의 앞에서는 그가 반말로 말을 건네는 것이 더 편할 거라 생각하네. 좋아. 다행이군. 그럼 얘기를 계속하지. 내가 자네에 대하여 쓴 것이 워낙 예전이라 오늘의 이 에피소드를 적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어쩌면 최종적으로는 삭제했을지도 모르겠네. 자네의 이야기는 꽤나 긴 세월을 다루고 있거든. 좋아. 우선 물어보고 싶은 건 자네의 권태에 대하여야. 나는 자네의 권태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네. 자네에 대하여 적을 무렵의 나는 지금보다는 훨씬 어렸지만, 그럼에도 지금 자네의 나이와는 10살은 넘게 차이가 났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나는 자네의 권태에 대하여 적어야만 했어. 당신은 그런 사람이거든. 권태는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지. 그것은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뭔가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것과도 달랐다네. 사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권태라고 적은 나의 단어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자네에게 꼭 묻고 싶었네. 자네 스스로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권태로움에 대하여 말일세. 아, 미안하네. 내가 또 너무 앞서갔구먼. 당신은 합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사람이었지. 지금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그건 당황과는 거리가 멀어. 자네가 얼마나 그런 종류의 감정과 거리가 먼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네. 내가 자네에 대하여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부분이 그 부분이니까 말일세. 그럼 아마도 자네는 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위험이 감지되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또 적당히 즐길 수도 있을 걸세. 당신은 말수가 적지만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이니까 말일세. 언제나 합리적으로 사고하지만, 언제나 비합리적 상황을 상상하고는 했었으니까. 좋아. 고맙네. 내가 당신에 대하여 너무 아는 척을 하고 있군. 많은 작가들의 고질적인 문제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 대하여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일세. 사실 나이가 들면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하여 모르고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만큼, 어떤 부분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해. 그럼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자네의 권태에 대하여 말일세."
그는 저에게 권태에 대하여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비록 그의 단어 선정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가 권태라는 단어로 저에 대하여 말해준 덕에 오히려 많은 것이 선명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권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로 마지막 의심마저 떨쳐낼 수 있었죠. 권태이면서 권태가 아닌 무엇. 저는 그것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는 저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째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삶과 떨어져 있는 어떤 순간에 대하여 그에게 그렇게 쉽사리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와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나에 대하여 쓰듯이 저는 그렇게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군. 자네의 권태는 허무와 다르기 때문에 권태가 아니었던 거야. 자네는 삶의 한복판에 있었어. 하지만 스스로를 마치 생물보다는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봤지. 자네에게 스스로와 타인은 차이가 없었어. 마찬가지로 생물과 무생물도 차이가 없었지. 무생물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삶이 당신의 태도였군. 그래 그거면 모두 이해가 돼. 그래서 나는 당신에 대하여 그렇게 썼던 거로군. 그래 사랑에 대하여도 썼었지. 그래 한복판에 있었던 거야. 나는 어째서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희생적이고 열정적으로 썼는지 궁금했다네. 그건 열정 같은 것이 아니었어. 당신을 포함한 무생물의 세계에 나타난 사람. 그래서 당신은 그저 사람에게 걸맞은 행동을 했던 것뿐이야. 그래서 그 끝이 그렇게나 허무했던 것이로군. 당신이 스스로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도 단순해지는군. 어때 내 말이 맞는가?"
속마음을 읽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의 작가인만큼 저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왜 그런 이야기를 적었는지 물었습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적을 수가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 자네다운 질문이군. 이해가 모든 것의 시작인 당신에게는 특히나 말이야. 당신에게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연성이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개연성은 사실 있던 사실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네. 나는 당신의 사건들에 대하여 적었지. 그렇게 사건들을 적고 나면 우리는 어느 틈엔가 사건들 사이의 개연성을 만들어내지. 그렇게 당신이라는 자아가 탄생하게 되는 거야. 보통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거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네. 스스로가 먼저 있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고 말이야. 하지만 난 사건이 먼저 있고, 거기서 자아가 탄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자네는 그렇게 세상에 등장한 걸세. "
순간 강아지가 크게 짖었습니다.
" 그렇군 이녀석도 이제 지겨운 거로군. 이제 가보게. 부디 오늘 밤이 즐겁기를 바라네.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거든. "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강아지는 이미 현관에 서있었고, 그는 웃으면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강아지는 복도로 달려 나가서는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제 눈을 빤히 보았습니다. 저는 강아지를 따라서 나갔습니다. 복도에 갑작스레 불이 켜졌습니다.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4층 복도 벽에는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옆모습들의 나열로 된 그 큰 그림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키 큰 신사, 하얀 개,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 웃으면서 잔을 나누고 있는 다섯 남자, 거울을 보는 남자, 그리고 또 다른 하얀 개와 키 큰 신사의 그림이었습니다. 강아지는 그림을 보는 저를 쳐다보더니 계단 쪽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강아지의 인도를 순순히 따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