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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발바닥에 축배

by 읽고보고맛보고 2022. 1. 25.

"이것과 저것을 저울질하지 않기 위하여 떠나고 또 떠났는데, 저는 아직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였네요."

어묵탕과 소주를 앞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술집 안에는 우리 외에 손님이 없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습니다. 그와 저는 작은방에 앉아서 소주잔을 부딪쳤습니다.

"몇 살쯤 되셨습니까?"

조금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를 묻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쯤'이라니. 물론 나이가 많아지면 자기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묻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저는 이제 올해 50 이 되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술잔을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이렇게 제안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질문의 의아함을 생각하다가 대답하지 못한 나이까지 포함하여 올해 36살이고, 일한 지는 6, 7년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일하는데 저 때문에 불편했던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한적한 시골 카페에 매일같이 커피를 팔아주는 손님이 싫을 리가 있겠냐고 했습니다. 그는 너무 오래도록 자리 차지하고 있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자리 차지 같은 걸 따질 필요도 없을 만큼 한가한 카페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원하시는 만큼 있으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맙다고 말했죠.

술이 한잔 두 잔 마셨습니다.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바리스타로 오래 일하다가 제 카페를 내고 싶어서 찾고 찾아서 이곳에 카페를 내었다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한적한 곳에 큰 카페들로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을 노렸다는 것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질문들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평일에도 카페를 오실 수 있는지, 사실은 큰 부자는 아닌지 그런 것들 말입니다. 평소 궁금했음에도 물어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술자리를 제안한 것도 이런 호기심이 동해서였으니까요.

"특별한 사정은 없습니다. 그저 일찌감치 은퇴한 직장인일 뿐이에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알아주는 대기업에 있었고, 벌이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냥 남들이랑 다 똑같이 그렇게 살았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때로는 이성도 만나고 그렇게 말이죠. 그러다가 어느 날 말이죠, 집에서 유리 조각을 밟았어요. 아마 깨진 유리잔 조각이 어딘가 남이 있었나 봐요. 분명히 걸레로 바닥도 다 닦았는데 말이죠. 그 유리잔이 깨진 지도 한참이 되었던 거 같은데, 그 조각이 남아있었나 봐요.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발바닥에 상처가 아프기는 했지만, 그렇게 깊은 상처도 아니었어요. 걸어 다니면 아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걸어 다닐 정도도 아니었고요. 그저 며칠 고생하겠다 싶은 상처였죠.

그런데 말이에요. 상처가 아물지를 않는 거예요. 발바닥에 딱지가 생기고 떨어지고, 다시 피가 나고, 그러면서 점점 더 아파지는 거예요 상처가. 병원에 갔더니, 그냥 상처라고 하더군요. 발을 깨끗이 관리하고 물을 잘 말리라고요. 그리고 방수 패치? 그런 것도 주더군요. 제법 비싸던데. 그걸 평소에 붙이면 나을 거래요. 그렇게 또 좋아지겠지 하면서 몇 달이 지났는데, 상처가 점점 더 커지는 거 같은 거예요. 딱지가 떨어질 때마다 점점 더 피도 많이 나고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른 병원에 갔는데, 처방은 똑같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무슨 장기가 아프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발바닥이 아픈 건데 이게 큰 병일 것 같지는 않고.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좋아져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좀처럼 좋아지지가 않는단 말이죠. 무슨 상처 연고 같은 걸 받아서 발라도 보고 했는데, 차이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도저히 출근을 할 수가 없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이제 더 이상은 남들이랑 다 똑같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요. 이 발로는 더 이상 남들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출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발이 너무 아파서 바닥을 딛고, 남들처럼 설 수가 없었어요.

회사를 퇴직하고, 집을 정리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모아둔 돈으로 아직 굶어 죽지는 않고 있네요. 여기 산지는 한 2년 정도 된 거 같아요."

그는 진심으로 발바닥의 상처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저를 놀리고 있지는 않았어요. 그는 정말로 그 상처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회사를 다니며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발바닥의 상처 때문에 시작된 인생 2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에게 그 상처를 원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째로 뒤엎어버린 그의 상처를 말이죠. 그는 말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발바닥의 상처 때문에 삶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요. 산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인과관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어떤 일들이 벌어져 버린답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장황하게도 설명하고는 하죠. 저도 삶을 오래도록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정도는 알 것 같더군요. 진짜로 우연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당연한 일은 더더욱 없다는 것이요. 필연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는 아직도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네요."

술자리는 한참을 이어졌습니다. 소주잔이 채워지고 비워졌습니다. 그가 전해준 내일의 의미에 저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바닥의 상처가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발바닥의 상처에 건배를 청했습니다. 그는 이제 어느 쪽 발인 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축하할 일이라면서 우리는 잔을 기울였습니다. 어묵탕을 사이에 둔 축배는 끝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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