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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소개팅 관찰기

by 읽고보고맛보고 2022. 1. 24.

남자는 저벅저벅 카페로 들어왔다. 책을 들여다보던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슬랙스, 단화, 오트밀 색 니트를 입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키는 175 정도 되어 보였다. 웨이브 진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남자는 내 옆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작은 사이즈요.', '네 감사합니다.' 주문을 마친 그는 진동벨을 들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을 법한 남자였다. 30대 초반? 중반? 20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복장에도 인상에도 튀는 구석은 없었다. 차고 있는 시계나 신발이 뭔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문외한인 나도 알 정도의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물건이 명품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대번에 그가 소개팅을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 소개팅을 맞이하는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티가 난다. 나름대로 꾸민듯한 외모는 사실 데이트가 있는 남자에게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요즈음은 특별한 용건이 없이도 잘 꾸미는 남자들이 많다. 소개팅이라고 해서 상대방이 도착하기 전까지 뭔가 필수적으로 하는 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소개팅을 맞이하는 남자는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 비언어적 제스처들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은 면접이나 시험을 앞둔 사람과는 또 다르다. 그는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긴장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져있다. 긴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긴장을 만들어내는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카페는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테이블 간 간격이 넓은 편이고 그렇게 좁지는 않아 카운터의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다. 인테리어도 나쁘지 않고, 역에서 멀지도 않은 편인데다가 대로변에 있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소개팅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시간은 대략 5시 10분 정도 전이었다. 여기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일까? 어쩌면 간단히 커피만 한잔하고 헤어질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단 여기서 얘기를 나눠보고 식사를 하러 갈지 말지 결정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5시 10분이 넘어서도 남자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어쩌면 내가 틀린 걸까 싶던 그 찰나에 여자분이 카페에 들어선다. 묘하게 불편한 듯 단정한 차림. 나는 이 소개팅의 에티켓에 사실 불만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소개팅의 매너 같은 저 여성분의 옷차림과 스타일은 대체 어떤 예의인 걸까? 보통 소개팅을 하는 여자분들은 마치 결혼식에 가는 듯한 복장을 입고 오신다. 그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자 하는 복장과도 다르고, 편하게 입고 오는 복장과도 다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중간함이 누구를 위한 예의인지 항상 고민하고는 한다. 물론 남자에게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는 하지만, 보통 남자들은 '꾸민다'라고 한꺼번에 취급해도 좋을 만큼 이런 유의 자리에서의 복장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섬세함의 차이인지 정말로 어떤 편견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은 차치하기로 하자. 지금 내가 확신하는 것은 내 옆 옆 테이블에 앉을 여자분은 저분이라는 것이다.

여자분은 제법 미인이시다.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은 화장과 복장, 너무 높지 않은 하이힐과 치마, 얇은 버버리 코트를 입고서 안절부절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마 이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저분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는 나와 그 남자뿐이다. 하지만 나는 누가 보아도 동네 마실을 나온 아저씨다. 운동복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는 내 앞에 2/3는 비워져 있는 커피잔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자분은 마치 '누구실까' 하는 묘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녀가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이미 모든 사태를 파악했지만, 그것을 파악하지 않은 척을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것 같다.

이윽고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이지만,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이제부터 감정과 표현의 줄타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와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사이에서 결코 어느 쪽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는 호감을 예의인 양 포장해서 드러낼 것이고, 무관심을 피곤처럼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남녀의 차이가 나타나고 말 것이다. 여자는 조금 더 방어적으로 '나는 당신이 싫지 않아요'와 '나는 당신이 싫어요' 사이에서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취향과 호감과는 별개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포유류가 임신을 수행하는 주체와 그렇지 않은 주체로 성별이 갈라진 이후로, 임신을 하지 않는 주체는 구애에 적극적인 개체들이 다수 살아남았고, 그러한 유전자를 많이 가진 개체들이 자신들의 유전자를 더 많이 보존했다. 임신을 수행하는 주체는 더 방어적인 주체들이 더 많이 살아남아 자신들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에 성공했다. 인간 역시 이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공작의 날개를 펼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구애의 춤을 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어떤 이성에게든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은 정재 되고 세련된 형태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류가 유구한 시간 동안 문화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단편적인 단어들이 들리지만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 소개팅을 관찰하는 것을 휴일 늦은 오후의 유희거리로 삼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옮기거나 카페 안을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그것은 관찰대상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고, 나는 그것만큼은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사실 그런 형태의 리스크를 짊어져야만 할 만큼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이 이 관찰에 핵심은 아니다.

이야기는 주로 남자가 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이러한 만남의 형태이다. 우리가 많은 심리학적 분석에서 만났던 호감을 가진 사람의 자세적 특성을 이 자리에 투영시켜서 관찰을 시도해본다. 남자의 상체는 어떤 방향인가. 여자는 어떠한가. 팔짱은 끼고 있는가. 발, 그리고 무릎의 방향은 어떠한가. 하지만 이런 분석은 변수가 너무 많다. 지금 남자의 상체는 의자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이 적극성의 부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자는 긴장된 스스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자의 발은 남자 쪽이 아닌 카운터 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평소 다리를 꼬는 자세를 편하게 취하는 여자가 이 자리에서는 다리를 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바람에 틀어진 골반으로 인하여 다소 자세가 엉거주춤 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카운터 쪽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무릎에서 남자가 맘에 안 든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주목할 부분은 호감의 유무보다 관계 주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자리가 지루할 때, 당신이 상대방에게 호감이 없다면 상대방을 지루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의 지루함을 자책하게 된다. 이 권력관계는 호감을 가진 쪽이 어디인지 이상으로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적용된다. 이는 '대화를 누가 주도하는가' 와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누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말의 양이 중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남자의 표정과 대화의 양은 숨길 수 없는 권력관계의 증거이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끓어내는 것'을 대화의 기술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대화의 기술은 유혹의 기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남자가 현재 어떤 심경인지는 알 수 없고, 정확히 어떤 말을 전달하고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그는 이러한 유혹의 기술을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실 이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자 마음을 잘 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저 남자는 과연 이 상황을 잘 타파하고 있을까? 여자의 저 표정은 그저 의자가 불편해서 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자리를 위하여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어서 저녁 식사 자리로 이동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표정의 발생 원인은 통계적으로 많은 경우 대화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합적인 이유를 다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아주 높은 확률로 저 남자는 차였다.

1시간 남짓이 흘렀을까. 그들이 짐을 챙겨든다. 근처의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을까. 대체 이 나라에 이러한 남녀의 만남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걸까. 결혼이 늦어지고, 독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훨씬 더 복합적인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나는 분명히 이 연애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케팅 전략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개팅과 썸, 그리고 연애가 없다면 이 많은 레스토랑들은 매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드라마, 영화, 대중매체는 매출을 유지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의류와 액세서리 브랜드는 또 어떠한가.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통일교식 지정 결혼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이런 종류의 산업들의 발전은 훨씬 늦었을지 모른다.

남자는 처음 이 카페라는 링에 입장하던 모습보다는 조금 지쳐 보인다. 한 시간 남짓한 전투에서 많은 것을 소진했을지도 모른다. 한 시간 전의 그는 지금 그의 모습을 예상했을까? 지금의 그는 또 어떤 다음 라운드를 그리고 있을까? 어쩌면 이미 지쳐 탈진하여 숨겨두었던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편이 더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의 뇌는 항상 스토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마구잡이로 하는 사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관계를 역전시킨 사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갑자기 이 남자는 주도권을 가진 남자가 된다. 자포자기했을 뿐인 이 남자가 말이다.

이제 읽던 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나는 저 남자가 차였음을 예상하지만, 어떤 반전이 일어날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 두 사람이 다음번에 또 이 카페로 들어올지는 한번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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