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시작은 편의점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맥주가 다 떨어졌거든요. 아직 잠은 안 오고, 산책 겸 편의점이나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집 바로 앞에도 편의점이 있지만, 산책도 겸하고 잇었기에 더 먼 곳에 있는 편의점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정말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았고, 거리에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만 처량하게 밝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봄에 접어드나 싶은 그런 날씨여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서 산책을 할만한 날씨가 되었으니까요. 전 걷는 걸 좋아하거든요. 두꺼운 패딩을 입지 않고 가벼운 후드 집업만 걸치고도 쾌적했어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워서 산책이 힘들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이 시기를 즐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저 멀리에 있는 가로등 밑에 강아지가 한마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고양이도 아니고 강아지였으니까요. 사실 강아지라기엔 제법 큰 개였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만한 작은 녀석도 아니었습니다. 네발로 서있는 녀석의 머리가 제 허벅지 높이까지는 올라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 강아지가 가로등 밑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거에요. 처음엔 인형인가 생각했지만,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지니 살아있는 강아지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무서워하거나 당황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강아지가 묘하게 웃는 얼굴 같은 거예요. 뚫어져라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고 반갑기만 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대도 하나도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없다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강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차 한 대나 지나갈법한 골목길에서 저와 강아지는 마주 했습니다. 제가 머리에 손을 얹을 때까지도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길에서 사는 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몸 상태도 아주 깨끗했고, 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거든요. 하지만 목걸이나 그런 건 없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주인을 찾거나, 인식표 같은 걸 찾으려고 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일단 쓰다듬었죠. 그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 녀석은 제가 쓰다듬는 걸 좋아하고 있었어요. 제 착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녀석이 제 갈길을 가는가 보다 했는데, 묘하게 몸짓이 따라오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 걸음걸이의 템포, 그 고갯짓 같은 게 그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에는 가로등 밑에서 어쩔 줄 모르고 그 녀석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러자 그 녀석이 다음 가로등 근처에 서서는 다시 저를 바라보는 거예요. 절 기다리고 있는 거였죠. 저는 그래 산책인데 뭐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녀석을 따라갔죠.
강아지를 따라서 들어간 골목은 빌라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어요. 제 집과 비슷한 그런 골목이죠. 아마도 지나간적이 있을 겁니다. 이 동네에 제가 모르는 골목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날은 묘하게 그 골목이 낯선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늦은 밤이어서는 아닐 것 같아요. 제가 밤에 산책은 간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날은 분명히 뭔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뭔가 묘하게 그림 같다고 해야 할까요. 빌라 건물의 현관문이 어떤 곳은 닫혀있고 어떤 곳은 열려있고 어떤 곳은 불이 켜져 있고 어떤 곳은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빌라의 집들도 대부분은 불이 꺼져있었지만 몇몇 곳은 켜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 전체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설계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설정을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창문의 때까지도 모두 누군가가 일부러 그려놓은 것 같았어요. 저는 묘한 황홀경에 빠져 들었습니다. 꿈꾸는 기분으로 골목을 걸어갔죠. 강아지는 주기적으로 절 뒤돌아보면서 앞서 걸었습니다. 제법 걸은 것 같은데도 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긴 골목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집들은 계속되었고, 강아지는 계속해서 경쾌하게 앞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둡다고 느꼈습니다. 분명히 뭔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 건물들의 불빛이 모두 꺼졌더군요. 그래서 빛나는 것은 가로등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저 앞에 있는 가로등 밑에 어떤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남자는 까만 양복을 입고 까만 중절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키가 아주 커 보이던 그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전신주에 기대어서 있었습니다. 취객 같지는 않았습니다. 옷매무새도 깔끔해 보였고, 기대어 서있는 자세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남자를 지나서 유유히 걸어갔고, 저는 강아지를 따라서 그 남자의 곁을 지나가려 했습니다. 강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닫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서 이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제 팔을 잡았습니다. 오른손을 뻗어서 제 오른팔을 잡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는 가까이서 보니 더 키가 커 보였습니다. 190도 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왔죠"
저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강아지를 따라왔어요 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살 것 같았습니다. 저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남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강아지가 절 바라보고 짖었습니다. 단 한 번의 '멍' 하는 그 소리는 저에게 왜 따라오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려 강아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깊이 눌러썼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아주 단정한 얼굴이었습니다. 아주 깔끔한 턱선,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 높고 오뚝한 코, 정석적인 미남이었습니다. 살짝 차가워 보이는 인상은 아마 화장을 한듯한 하얀 피부톤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저를 봤습니다.
"저 녀석을 따라온거군요"
의문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팔을 놓았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그에게 압도되어 아직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잠시 쳐다보더니 제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먼저 말을 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속 가세요."
저는 아무래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미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전신주에 기대었습니다.
그때 또 강아지가 저를 보고 짖었습니다. 저는 다시 강아지를 따라 걸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가다 보니 이 녀석이 어딘가 건물 현관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러고는 건물의 현관으로 향하더군요. 신기하게도 녀석은 자동문이 어떻게 열리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동문 앞에 서서 건물이 열리기를 기다리거든요.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고, 녀석이 안으로 들어가고 현관의 등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를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저는 선뜻 녀석을 따라 처음 보는 빌라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들어가도 될 것 같았습니다. 주민들이나 경비원 분에게 오해를 받아도 저 녀석이 들어와서 대리고 나가려고 들어왔다고 하면 될 것도 같았습니다. 강아지는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한층 한층 올라가더니 4층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문을 바라보더군요. 그리고는 아주 즐거운 듯이 또 한 번 짖었습니다 '멍'.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늦은 밤에 건물 안에서 짖다뇨.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었습니다. 어서 저 녀석들 대리고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강아지를 안아 들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집 앞에서 개가 짖으니 시끄러워서 나왔구나 싶어 어서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큰일이 났구나 싶어서 사과를 하려는 찰나에 현관 물을 열고 나온 남자가 말을 했습니다.
"뭐야, 네 녀석이냐. 오랜만이구나."
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남자는 강아지를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강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이구나'는 주인은 아니라는 것 같은데, 그럼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남자는 강아지를 쓰다듬었고, 강아지는 기분이 좋은 듯이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아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남자도 뭔가 눈치챈 듯이 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러더니 남자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제법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백발이 성성한 분이더군요. 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가 강아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저 남자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강아지를 따라왔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야밤에 강아지를 쫓아서 여기까지 왔다니, 강아지가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느니. 그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너무 수상할 것 같았습니다.
'멍'. 제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강아지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향해 짖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강아지와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뭐야. 그런 게냐. 네가 데려온 거구나."
그리고 남자는 다시 저를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그래, 당신이로군."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제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반갑네 정말로. 내 소설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은 이번에 세 번째야. 하지만 난 첫번째 두번째 보다 내 세번째 소설을 훨씬 좋아한다네. 정말로 반가워. 어서 들어와 어서."
저는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농담을 하는 걸까요. 어쩌면 뭔가 무시무시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정신이상자일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의 몸짓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기묘한 상황에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순순히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아지는 이미 집안에서 고개를 돌려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집 안의 첫인상은 갈색이었습니다. 뭔가 요즈음의 집들 분위기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모노톤과는 거리가 먼 갈색과 주황빛의 공간이었습니다. 짙은 목재 색의 탁자와 의자, 갈색 방문, 그리고 복잡한 무늬의 카펫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앉게. 편히 앉아."
그는 식탁의 의자에 자리를 권했습니다. 단출한 식탁 위에는 찻주전자 하나와 엎어진 컵 두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부엌을 뒤적이더니 녹차 티백을 두개 가지고 돌아와서는 컵에 담고 찻주전자의 물을 부었습니다.
"마침 차를 마시려던 참이라 잘 되었군."
저는 어안이 벙벙하여 잘 마시겠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건넸습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그와 저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차를 홀짝이는 저를 은은한 미소를 띠고서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당황스러울 거야.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호기심이 많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지.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사실 이상할 것은 없다네. 당신은 스스로가 누군가의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소설의 등장인물이거든. 모두가 다 등장인물이고, 모두가 다 주인공인 것은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여러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어떤 사람은 누구의 작품에도 등장하지 않지. 그 불공평은 참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의 일인 것을 어찌하겠나. 내가 나라는 우연을 70년이 넘도록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쓰는 것뿐이더군. 누군가 나를 쓰고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나의 작가를 찾아내지 못했다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노인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죠. 저는 이래 봬도 나름대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무너졌다든가 하는 판타지 소설의 소재로나 쓰일법한 이런 얘기를 듣고 '아 그렇군요'라고 생각하거나, 그 말에 현혹되어서 혼란스러워할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왜 이 노인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오늘 이곳에 방문한 것은 저 강아지가 정말 놀랍도록 정교한 훈련을 받은 것이라는 가정을 빼면,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전혀 망설임 없이 저에게 당신은 내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말했습니다.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습니다. 조현병이라던가 그런 뭔가 판타지를 믿게 되는 그런 병 말입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병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어 쉽사리 유추는 못하지만, 당연히 우선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내가 그런 노인의 앞에 앉은 게 아닐까 했습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편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집안의 분위기와 그 노인의 미소 그리고 딱 적당한 온도의 맛있는 차 덕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물론 저도 그것이 그렇게 수상한 사람의 앞에서 그렇게 경계심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