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
청년은 창백한 거리를 걸어갔다. 몇몇의 편의점 불빛, 그리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취객의 걸음걸이로 거리는 완성되어 있었다. 청년은 기분이 좋다. 완벽한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청년은 오늘 목표했던 코드를 완성했고, 며칠을 진도를 나가지 않았던 책을 거의 다 읽었고, 훌륭하게 운동을 끝냈다. 이제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과 함께할 맥주만 사 오면 완벽하다. 가벼운 발걸음과 콧노래가 정적을 깨운다. 순간 청년은 누군가 들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저 멀리 비틀거리는 양복 차림의 아저씨를 제외하면 이 거리는 완벽히 조용하다.
앉아있는 여자. 건물 주차장과 주차장을 나누는 낮은 벽돌담. 그 위에 한 여자가 앉아있다. 청년은 궁금증이 동한다. 높은 하이힐, 그리고 몸매가 드러나보이는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 그 위에 걸친 롱코트. 청년의 심장이 요동친다. 저 여자는 무슨 사연이 있어 저렇게 앉아 있는 걸까. 취해서 귀가길에 쉬고 있는 걸까. 뭔가 힘든 일이 있는 걸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혹시나 술에 취해서 이 앞에 사는 전 남자친구의 집 앞에 찾아온 걸까.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시작했지만 그 만남에서 전 남자 친구가 어떤 알게 모르게 해 줬던 배려를 이재서야 깨닫고 여기까지 온 걸까. 전 남자 친구에게 연락은 했을까. 그의 집 앞에 있는 어디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고 했을까. 아니면 여기까지 와서는 용기가 나지 않아 우연처럼 그 남자를 만나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쩌면 연락이 닫지 않은 걸까. 그럼에도 취기에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렇게 앉아있는 걸까.
어쩌면 힘든 회식이 있던건 아닐까. 큰 프로젝트를 힘들게 끝내고서 이제 진짜 끝났다면서 직원들 모두가 모여서 회식을 했던 건 아닐까. 거기서 술에 얼큰히 취한 사람들이 이제 속마음들을 조금씩 토로했겠지. 어쩌면 상사에게 '너 고생한 건 아는데'로 시작한 어떤 훈계를 들은 건 아닐까, 아니면 친했다고 생각한 동료들에게 '사실은 솔직히 그때는' 같은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 그래서 저렇게 그 말들을 곱씹으면서 저렇게 낮은 벽돌담 위에 앉아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집에 들어가기 싫은걸까. 뭔가 부모님과 불화가 있는 건 아닐까. 어머니 또는 아버지일까. 사실 집안 사정이란 건 누구에게나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 더 다양하게 개인적인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려운. 어쩌면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너무 많아서 더 어려운 그런 사정들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청년이 저분에게 반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었다. 그 너무 잘 꾸민, 그러나 지금은 약간은 부스스한 느낌이 드는 저 웨이브 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 모습에, 그리고 저 찌푸린 표정의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는 듯한 저 표정에, 그리고 그 딱 붙는 원피스에게 느껴지는 자신감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들에서 청년을 설득시킨 외모에. 그래서 청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자신의 추레한 모습에, 아무도 만날 일이 없어 면도를 하지 않은 자신을 후회하면서 천천히 그 곁을 지났다. 말을 걸 수 있을까. 한 걸음에 고민을 담고 한 걸음에 결심을 담고, 한 걸음에 다시 고민을 담는다. 청년은 저 표정에 반했지만, 그럼에도 그 표정으로 청년이 밀려나고 있다. 취한 여자에게 추근 덕대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다. 어정쩡한 마음으로 오해받고 싶지도 않다. 지금 청년은 너무나도 진심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곳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뿐이다.
청년은 그 길을 지나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맥주 캔들을 잔뜩 담는다. 혹시나 돌아가는 길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청년의 사랑은 여기까지 일까. 이것은 순간의 경박한 충돌을 이겨낸 일일까. 일생의 인연을 놓친 것일까. 청년은 어느 것도 알 수 없지만, 다만 그가 이 편의점을 나서서 다시 담벼락을 지날 때 그녀가 그곳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