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알콜예찬

읽고보고맛보고 2022. 2. 12. 23:38

첫 잔을 들이켠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약함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약자들의 혁명이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솔직해졌음은 사실이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나와 같은 약한 자를 찾아 헤맬 이유가 없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혼자이면서 연결된 이유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명은 동거인 없이 생활이 가능한 기술을 발전시켰고, 기어코는 약자들을 이어주었다. 이제 나의 치부를 인터넷에 마음껏 끄적이고 날것의 반응들을 함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번듯한 나를 연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번듯한 사람일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 요플레 뚜껑을 핥는 나는, 남의 인스타그램을 훔쳐보는 나는, 홀로 외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즐기는 나는, 나에게 한없이 괴상한 인간인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우리는 모두 이상하다는 것을 인터넷이 훌륭히 증명하지 않았는가.

이제 두번째 잔을 들이켠다. 우리는 이제 외로움을 인정할 수 있다. 다이나믹 듀오의 음악을 듣는다. 그냥 외롭기 때문에 연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찌질한 경험담을 본다. 이제 굳이 술친구가 없어도, 수많은 사례가 나의 외로움이 그들과 같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핸드폰 따위는 집어던질 수 있다. 외롭다. 그래서 외로운 당신들과 하나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랜선만 있다면 당신들과 나는 헤어지지 않는다. 구글이 망하지 않는 한 유튜브는 영상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공한다.

이제 세 번째 잔을 들이켠다. 그럼에도 온기가 그립다. 그럼에도 온기가 그리운 사람들이 한가득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아직 네 번째 잔이 있으니까. 네 번째 잔에도 외롭다면 다섯 번째 잔이 있으니까. 인터넷이 가져온 위로는 외롭기 때문에 얻는 위로다. 이 모순으로 인하여 우리는 결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이 세 번째 잔이 필요하다. 당신의 눈에 비친 것이 모니터 화면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대뇌뿐이고, 당신의 대뇌에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잔뿐이다.

네 번째 잔을 들이켠다. 이제 슬슬 이 글이 두서가 없다는 것을 당신이 눈치챘다면, 아마도 나와 함께 네 번째 잔을 들이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니까. 메멘토 모리라고 하였던가. 내 책상에 해골이 놓여져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술로 인하여 죽어간 수많은 인류에게 이 네번째 잔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숨 쉬는 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이유는 우리가 숨쉬기 때문이지,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쉬는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제 다섯 번째 잔이다. 네 번째 잔부터 이미 당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취하기에는 멀었다. 알코올의 사랑스러움을 논하기에 이 다섯 번째 잔은 아직 이르다. 맛있는 술은 그 맛으로 여러잔을 마시게 한다. 하지만 맛이 없는 술은 여러잔을 마심으로서 맛있어진다. 이제 다섯번째 잔을 들이켰다면 당신에게 맛없는 술 같은 것은 없다. 걱정을 떨치고 다시 한번 사랑을 외쳐라. 다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