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보고맛보고 2022. 1. 25. 21:36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나서 배를 움켜쥐었습니다. 저는 항상 엄살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남들은 이런 복통을 어떻게 느낄까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끔찍한 고통이라고 생각할까요. 저는 이제 뭔가를 궁금해할 나이는 지났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궁금합니다.

해가 화창한 주말 오전이었습니다. 고통에 대하여 적기에 저는 너무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 묵직한 느낌을 고통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그저 나이 듦에 따른 불편함의 하나인지 저는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리하게 알려면 남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제가 진정으로 공감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저 제 느낌으로 아프다 아프지 않다를 말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저 남들이 다 느끼는 그런 불편함을 저 혼자 고통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면 어떡하죠?

근거는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제가 아프다는 객관적인 증거 말입니다. 물론 병원에 가서 배가 아프다고 말해볼 수도 있겠죠. 그럼 뭔가 진단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아플 이유가 없다고 병원에서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소화 불량이니까 소화제나 하나 먹으라고 한다면요. 저는 남들이 다 겪는 그런 일로 병원에 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이고 싶으니까요. 누구라도 이 정도면 병원에 가야지 하는 그런 상태까지는 버틸 수 있는 그런 무디고 강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것이 남자이니까요.

우리는 바야흐로 감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감염병이 만연하지 않은 시대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이 방역의 시대라고 생각해야겠죠. 스페인 독감, 페스트, 천연두는 그렇게 먼 옛날도 아닙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30대를 돌파한것이 그렇게 오랜 옛날이 아니란 것은 전염병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이 그렇게 최근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아파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류사를 통틀어볼때 저는 아픈 사람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어지간한 평균 수명을 넘어서 살만큼 산 사람의 한 명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1800년대 초반의 인간 문명과 1800년대 후반의 인간 문명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기원전 4세기와 3세기를 엄밀하게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듯이 2000년대 초반의 제 삶은 세계대전의 시대와 크게 멀지 않은 시기로 구분되지 않을까요. 전쟁터에서, 그리고 전쟁터가 아닌 많은 도시와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그 시절과 그렇게 멀지 않은 시대로 구분해서요.

그렇다면 제가 갑자기 죽어도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제 복통은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닐 겁니다. 이게 과연 진짜로 아픈 것이냐를 따지는 일은 더더욱 사소한 일이 아닐까요.

화창의 주말 오전은 이제 다 지나갔고, 저는 이제 걷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사랑이 특별할까요. 이 사소한 고통만 남기는 것이 이별이라면, 왜 그것이 특별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는 우리의 유사성에 달려있겠죠. 니일이 내일 같은 그 유사성에 말입니다. 특별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유사성 덕분에 특별해지는 우리의 모든 인생들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