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후
눈을 떠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출근을 하지 않는 A는 창밖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A는 커튼을 열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커피를 들고 창가에 서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그림 제목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 좋겠다. 창문을 살짝 열자, 기분 좋은 한기가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침에 내리는 비만큼 불공평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을까? 우선 첫째로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터로 향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한다. 아침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여 누군가를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하지만, 비가 내리면 이는 더 극적이 된다. 다음으로 당신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지 자가용을 이용하는지를 더 극명하게 대비해 준다. 젖은 우산으로 가득 찬 대중교통에서 느껴지는 짜증은 평소에 비하여 박탈감을 한층 더 해준다. 자가용을 이용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동선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어딘가 야외 주차장을 이용해야만 하는지도 대비가 된다. 전자가 아니라면 결국 우산을 받쳐 들고, 물웅덩이를 피해야 하는 사태가 오고 말 테니까.
그의 작은 오피스텔은 고요했다. A는 종종 음악을 틀어두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마도 곧 그가 즐겨듣는 피아노 재즈곡을 틀 것이다. 피아노 소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최고의 소리를 낼 것이다. 그가 쓴 웹소설의 웹툰과, 그리고 영화화가 결정되면서 그는 퇴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웹툰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그림작가의 문제라고 항상 생각하지만, 그는 스토리를 넘겨주었을 뿐이기에 그 웹툰에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화화가 무산되었다. 물론 이 업계에는 정말로 흔한 일이라고 하기에 A가 크게 동요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은 컸지만, A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A가 퇴사하던 날은 이상하리만치 더운 날이었다. 4월임에도 반팔이 어울리는 날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작은 박스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쇼핑백 하나만 들고서 건물을 나섰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가 입고 있는 맨투맨은 그날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소설의 영화화가 무너졌을 때, A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모두 무너졌다. 그를 지지해왔던 아내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소설의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남들의 결정이고, 그 결정은 언제라도 뒤바뀌는 것이었다. 그의 글의 가치를 믿는 것은 A 혼자뿐이 아닐까 싶었지만, A는 모두가 그의 스토리를 지지할 때도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했다.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났고, 그는 그가 한 번도 인연을 가지지 않았던 도시로 이주했다. 예산에 맞춘 선택이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대형 마트가 있는 고층 오피스텔이 있는 곳이었다. 교통이 형편없는 신도시였지만, A는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보릿고개를 겪었지만, 그의 작품을 좋게 보았던 PD가 있었다. 그는 A에게 드라마화를 제의했다. 영세한 업체였지만, A에게 거절할 여유는 없었다. OTT 업체의 난립으로 기회를 얻은 작은 업체였다. 그는 처음 히트했던 소설의 내용을 조금 더 다듬어서 인물들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정의롭지 않은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는 '사이다 전개'에 목마른 독자들이 정의로운 주인공들의 답답함에 질려 한다는 것에 착안했다. 그는 정의롭지 않은 주인공을 앞세워 정적들을 제거하고, 언론, 검찰, 경찰과 뒤에서 손을 잡고 사람들을 조종하는 내용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여타의 악역들을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제거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PD는 그가 그리는 권모술수와 암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웹 드라마들이 보통 청춘물에 그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예산의 문제로 다른 이야기를 그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작품이라면 인물들은 많이 필요하지만, CG를 비롯한 값비싼 촬영 기법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액션을 가미하기는 하겠지만 이 스토리의 핵심은 아니다.
A는 아직도 재즈를 틀지 않았다. 다음 화에 필요한 아이디어는 다 나와있다. 고민할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 A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이제 재즈와 빗소리의 하모니는 없을 것이다.
A가 사랑했던 그의 아내는 대책이 없는 A에게 질려버렸다. 영화화가 무너지고, 웹툰이 종영했음에도 그는 글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 대책도 없이 첫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쓸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A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당장 생활비를 줄여가고 있었지만, A는 그저 글을 쓰고 또 쓸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언제부턴가 A의 글을 읽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A는 언제나 아내에게 미안하다고만 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는 아내의 말에 A는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는 말만 반복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뭐가 바뀌냐고 화를 내는 아내에게 A는 말했다. '바뀔 거라고 생각해.'
이제 비가 그치고 해가 뜰까. 그의 아내는 돌아올까. 어쩌면 진눈깨비가 몰아칠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는 돌멩이 같은 우박들이 떨어져서 창문이 깨지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의 오피스텔 위에도 그런 구름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의 아내는 그를 그리워할까. 그의 지금의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어쩌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행복한 사랑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평균 기온이 조금만 더 낮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우리의 열이 조금은 더 식지 않았을까. 저렇게 한밤중 같았던 시커면 아침이 조금은 더 밝았지 않았을까. 점심의 태양이 조금은 덜 뜨겁지 않았을까. 퇴사하던 날 태양이 그렇게나 뜨겁지 않았다면, A는 한 번 더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혹시 이 모든 것은 평균 기온 때문이 아닐까. 온난화와 이상기후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