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제 콤플렉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요? A 도 있었고, B 도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의 비극에 대하여 들었잖아요. 그건 정말 너무 엄청난 비극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질투가 났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엄청나게 행복하고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옛날 같은 건 기억이 안 나거든요.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또 그런 자리에서 얘기할 게 없어요. 저는 이야기가 없어요.
그런데 말이죠.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J 와 밥을 먹었거든요. 아 J는 제 여자 친구였던 사람이에요. 밥을 먹고 있는데, J 가 말하더라고요. 우리 헤어지자고 말이에요. 무슨 그런 이야기를 냉면 먹다가 하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다 먹고서도 아니고, 한창 면을 먹고 있는대 말이에요. 저는 물냉, J는 비냉이었거든요. J는 항상 비빔냉면이었어요. 그건 냉면 본연의 맛이 아니라고, 양념장 맛으로 먹는 자극적인 음식일 뿐이라고, 냉면을 좋아하면 물냉면을 먹어보라고 항상 그렇게 제가 말해도 J는 비빔냉면을 먹었어요. 그날도 그런 날이었죠. 아무튼 그 면을 입안에 욱여넣고 있는데, J가 우리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놀라서 J를 봤어요. 무슨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말한 표정도 아니고, 그냥 마치 우리 냉면 먹자고 말할 때랑 똑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J는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대요. 아무래도 저로는 안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얘기를 듣다 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J가 저보다 돈도 더 많고, 잘생기고, 얘기도 잘 통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잖아요? 저한테 안주하는 것보다 도전을 택하겠다는 J의 선택은 남자 친구라는 입장을 벗어던지고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한 거죠. 제 인생은 아무래도 뻔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저와 내일의 제가 똑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저에게 드라마틱 한 변화가 생겨서 큰 부자가 되거나, 잘생기게 되거나, 엄청나게 재밌는 사람이 될 가능성은 아주 낮지 않겠어요? 저는 큰 비극도 큰 요행도 없던 사람인 걸요.
저는 그렇게 J의 이야기에 납득을 하면서도 냉면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짐짓 놀란 척을 했죠.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냉면 면발을 입에 물고 있는 체로 이별 통보를 들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런 장면은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슬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에요. 저는 진심으로 J를 사랑했어요. 저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을 거예요.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이에요. 저 자신보다도 J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그래서 제가 슬펐던 것은 그 행복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제 저는 J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예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 냉면이 뚝 끊어지지 뭐예요? 아니 그 질긴 냉면 면발들이 말이에요. 한두 가닥도 아니고, 그 질기고 두꺼운 냉면 면발이 입에 물고 있는 그대로 갑자기 뚝 끊어졌다니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다죠? 그런 적이 있어요? 냉면 면발이 뚝 끊긴 적이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아니 그날 냉면 면발이 이상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 냉면집을 제가 몇 번이나 간 줄 아세요? 다른 곳보다도 더 질긴 면이라고요. 가위로 잘게 자르지 않으면 먹기도 어려운 그런 면이라고요. 그런데 마치 가위로 자른 것처럼 뚝 끊어졌다니까요? 그렇게 갑자기 후드득 떨어지던 장면이 눈에 선해요. 무슨 슬로우 모션처럼 냉면들이 그릇으로 떨어지더라니까요. 입에 물고 있는 조금만 남기고 다 끊겨서 떨어졌어요. 이게 무슨 미스터리죠? 누가 가위로 자른 것처럼요.
이제 아시겠어요? 제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요? 냉면 면발이 끊겼다니까요?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를 듣는 자리에서요. 냉면을 물고 있는 체로 이별 통보를 듣는 그 특별한 장면에서 갑자기 냉면이 끊겨서 없어져 버렸어요. 저는 살아있는 것이나 죽어있는 것이나 차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 거죠. 살아있는 시체 같은 거예요. 저는 그냥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으면 되는 거죠. 그래서 평범하지 않게 죽어야 했는데. 제 이야기는 이야기가 없는 체로 끝난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