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A 씨는 짐에서 깼다. 그의 옆자리가 허전했다. 함께 잠들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잠자리는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A 씨는 잠시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틀림없이 어제 잠자리는 그녀와 함께였다. 술도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 기억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어딜 간 거지...' 햇살이 비쳐 드는 창을 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는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그의 탁상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휴일치고는 이른 시간이었다. '벌써 일어날 시간은 아닌데...' 이번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탁상시계 위의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노란색 편지 봉투.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좋지 않다.' 그는 편지의 내용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넘겨집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여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가 편지의 내용을 짐작하지 못함에도 그는 그 편지와 그녀가 안 보이는 이유를 연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망설이며 편지를 집었다. 밀봉되어 있지 않았다. 봉투는 쉽게 열렸고, 그는 편지를 꺼냈다. 하얀색 편지지, 꾸밈없는 줄이 그어진 편지지였다. 편지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써진 듯했다. 종이에 글씨가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뒤에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A는 천천히 눈으로 글자를 따라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다 읽었다. 그는 속독 가는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는 그리 길지 않은 그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편지는 왜 그녀가 떠나야 하는지가 쓰여 있었다.
A는 '이 사람도 날 사랑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고는 그 편지를 다시 편지 봉투에 넣었다. 밀봉은 하지 않고 탁상시계 위에 두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 터 앉았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그는 그 어떤 이별의 말도 믿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지 않는다.' 이상의 뜻을 읽어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A는 밖으로 나왔다. 적당히 먹을 것이나 찾아 슈퍼에 들러 볼 요량이었다. 하늘색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날씨도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히 쾌적한,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항상 이용하던 버스 정류장이었다. 광고가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처음 보는 신발 광고 때문에 이렇게나 이 버스 정류장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A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 모델의 운동화 광고, A 씨는 그 광고에 집중했다. 평소 눈여겨본 적이 없는 여자 연예인이었지만, 이 사진은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A 씨는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치 터미널의 대합실 같았다. 다들 자기 차를 기다리는 무거운 공기. 정체되어 눅눅한 그런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벤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이가 지긋한 남성 한 분이 있을 뿐이었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백발이 섞여 있었지만 허리는 곧았다. 그는 등산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A 씨는 이 나이 대의 남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눈썰미가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버스가 도착했다. 파란 버스였다. 옆의 아저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버스였다. A 씨는 노선 번호를 보지 않았다. 그저 차에 탔다. 차 안에는 4 명 정도의 승객이 있었다. 버스 앞쪽의 좌우로 한 자리씩 있는 자리에는 쇼트커트를 한 여학생이 지루한 듯이 창문틀에 팔꿈치를 걸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 뒤쪽의 두 자리 씩 있는 자리에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부부가 앉아 있었고, 다른 자리에는 젊은 청년이 피곤한 듯이 졸고 있었다. A 씨는 잠시 버스 앞자리의 여학생을 잠시 보았을 뿐 다른 이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버스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노선도를 확인했다. 대학로, 명동을 지나서 용산, 강남까지 가는 버스였다. 번화가들을 이어주는, 제법 승객이 많을 거라고 기대되는 버스였다. 일요일 오전만 아니라면 제법 사람이 많겠다고 A 씨는 생각했다. 그가 이전에 이 버스를 타 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으레 차들이 몰리는 결혼식장, 마트들도 지나갔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A 씨는 창밖을 보았다. 그저 평범한 도심이었다. 어디서 본듯한 건물들과 상점들이 있었다. 아마도 실제로 많이 본 곳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터였다. A 씨는 꼼짝도 하지 않고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흥미로운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찾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A 씨는 그저 바라보고 싶었다. 일요일 아침답게 인적은 드물었고,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도 많았다. A 씨는 볼만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아름답다고 할법한 것은 한 가지도 없었지만, 햇살에 보도블록이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은 앙상한 나무들도 마음에 들었다.
승객들이 내렸다. 창밖만 바라보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낀 A 씨는 노부부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어느 틈엔가 여학생과 청년은 이미 버스에 없었다. A 씨는 그곳이 어디인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그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차내의 정류장 안내 방송을 들은 것 같았지만, 어디라고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자만 남은 A 씨는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버스를 타는 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승객도 없는 버스를 혼자 점유하고 있는 느낌이 싫었다. 마치 버스 기사가 자신만을 위하여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은 목적지도 없는 몸인데 말이다. 내릴 곳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인지 몰라도 집에 갈 때는 같은 버스를 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사실 뭐 이 버스가 아니더라도 집에 못 찾아갈 리는 없었다.
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섰다. 습관적으로 교통 카드를 단말기에 가져다 대었다. A 씨는 얼마나 더 가야 다음 정류장이 나오는지 몰랐지만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달렸다.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서 얼마간을 더 지체했다. A 씨는 멍하니 버스의 할 차 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A 씨는 습관적으로 또 교통 카드를 단말기에 가져다 대었다. 단말기는 이미 처리된 카드임을 알려주었다.
내린 곳은 아주 작은 정류장이었다. 이 정류장은 버스가 2종류만 하차하는 곳이었다. 주택가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번화가로 보이지도 않았다. 2차선 도로도 넓지 않았다. 일단 걷기로 했다. 작은 커피숍이 일층에 있는 빌딩을 지나갔다. 그리고 중학교가 나타났다. 별로 주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학교는 제법 시설이 좋아 보였다. A 씨는 학교로 들어갔다. 잔디가 깔려있는 학교에는 축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기축구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곳들과는 다른 떠들썩함이 있었다. A 씨는 천천히 운동장 주변을 돌았다. 축구 골대 뒤로는 높은 펜스가 있었다. 아마도 잘못 찬 공이 멀리 날아가서 사람이 다칠까 봐 설치한 것 같다고 A 씨는 생각했다. 그리고 펜스 뒤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을 축구 경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경기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누가 어떤 플레이를 하는지는 보지 않았으니까.
배가 고파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대충 한 9시에서 10시 사이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주머니의 휴대폰만 꺼내면 확인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학교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갔던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왔던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아주 천천히 걸었다. 분명히 나무 하나까지 모두 쳐다보면서 걸었지만, 기억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반대편에서 젊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연한 핑크색 겉옷을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꼼꼼히 화장을 했고, 머리도 단정했다. A 씨는 그 여자가 교회나 성당에 가거나 결혼식 참석을 예정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뭐 사실 무슨 일로 일요일 오전부터 저렇게 차려입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사실 A 씨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편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저 이 길이 지루했기 때문에 이 여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쳐 지나간 그 여자는 여자 밤에 그의 옆에 누워있었던 그녀와 거의 동일한 키였다.
길은 삼거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제법 큰길이 나타났다. 아직 그다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지럽게 널린 전단지들이 어젯밤의 떠들썩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만 아침부터 영업하는 가게는 한 군데도 없었다. A 씨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없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A 씨는 영업하는 가게를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했다.
문을 닫은 호프집을 지나서 골목이 나타났다. 호프집을 끼고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법한 길이었다. A 씨는 천천히 골목의 왼쪽을 눈으로 흩어보았다. 차례로 분식집, 꽃집이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골목 끝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퍼머기가 남아있는 긴 머리를 긁적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카키색 펑퍼짐한 반바지에 슬리퍼, 상의는 회색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는 다소 몽롱한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왔다.
A 씨는 의도적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왠지는 몰라도 이상하리만치 그가 싫었다. 왠지 모를 분노에 휩싸였다. 걷고 있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왠지 모르게 그 남자가 뒤통수를 보이는 순간에 그를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주변에 쓸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고, 긴장으로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다. A 씨는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인간 따위는 썩어나게 많았다. 그를 죽인다고 해도 이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어쩌면 아무도 모를지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가 알아챈다 해도 뒷일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되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이 남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뒷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흉기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길가에는 군데군데 버려진 음료수 캔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저런 것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우측으로는 도시락집 그리고 그 너머로 부동산이 있었다. 둘 모두 문을 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부동산 앞에는 세발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마침내 그 남자는 A 씨의 옆을 지나갔다. A 씨는 고개를 들었다. A 씨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았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뛰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무척이나 급했다.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걸음이 빨라졌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졌다.
그저 골목을 빠르게 걸어갔다. 뒤로 돌아서 큰 길로 나가는 것이 빠른 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A 씨는 그저 앞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골목은 금세 끝났다. 2차선 도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에 지나쳤던 길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다. A 씨는 길가에서 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는 빨리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택시가 많이 다니는 곳으로 장소를 옮기거나, 이곳이 어딘지 확인하고 집에 가는 방향을 확인하는 등 A 씨가 평소에 반드시 해오던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A 씨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아마 제법 오랜 시간을 팔을 휘저었던 것 같다. 택시 기사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A 씨는 타자마자 목적하고 있는 자신의 집을 얘기했고, 택시 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 택시 기사는 A 씨의 다급함을 느끼고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택시는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올 때와는 달리 길에 제법 많은 차들이 있어 보였다. 다만 A 씨는 거리를 내다볼 여유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밑을 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밝았다. 거리에는 언제나처럼 차와 사람과 도로, 그리고 뭔지 모를 소음이 혼재하고 있었다.
택시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A 씨는 택시 기사가 도착했다고 말할 때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카드로 택시 요금을 계산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면 그의 집이었다.
탁자 위에 고무줄이 올려져 있었다. 익숙한 생김새였다. 그의 것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금방 여자의 것임을 알아챘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러지 못했다. A 씨는 고무줄을 오른손 손목에 끼웠다. 아직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A 씨는 손목이 얇았다. 그는 왼손으로 고무줄을 늘여서 꼬은 다음 다시 한번 손목에 끼웠다. 두 겹이 된 고무줄은 이제 제법 팽팽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무줄을 오른 손목에 끼웠다. 이제 제법 압박감이 심해졌다. 그리고 한 번 더 왼손으로 고무줄을 늘여서 꼬이는 순간 고무줄은 찢어졌다.
찢어진 고무줄이 튀어 올랐고, 한쪽 끝이 얼굴을 때렸다. 광대뼈 근처에 약간 발그래한 생채기가 생겼다. A 씨는 그대로 손목을 보고 있었다. 손목에도 생채기가 나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서 침대 위를 보았다. 튕겨나간 찢어진 고무줄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탁상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