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도시 산책

읽고보고맛보고 2022. 1. 24. 21:12

유난히 계단이 가파르고 좁은 날이었다. 계단을 모두 내려오니, 음식물 쓰레기의 악취가 덮쳐왔다. 무엇인가가 부패하는 냄새는 언제나 내게 역한 반응을 끌어낸다. 더러운 것들이 발하는 냄새와는 다른, 죽어가는 것들만이 뿜어내는 그런 냄새가 있다. 황급히 거리로 나선다. 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 해를 볼 수는 없는 하늘이다. 공기에는 습기의 냄새가 나고, 구름의 그늘이 드리워진 거리는 무엇으로 축축해져 있는지 얼룩덜룩했다. 모퉁이를 돌아서 더 큰길로 나아간다.

 

"죽어. 이제 그만 됐어. 죽어줘. 뛰라고 어서. 내 말 알아들어? 어서 뛰어. 할 수 있다면서. 나를 위해서 뛰어준다면서.

왜 다리를 부들부들 떨어? 이제 와서 무서워 진거야? 못 뛰겠어? 그럼, 말이나 하지 말던가. 왜 기대하게 만들어? 뛰겠다고 했잖아. 그래. 넌 처음부터 이런 식이었어. 넌 항상 말뿐이었지. 내가 몰랐을 줄 알아? 넌 항상 그랬어. 마치 책임감이 넘쳐서 할 수 있는 일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중한 척, 사려 깊은 척은 다 했지. 그렇지만 난 다 알았어. 넌 그냥 그런 척이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냥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고서 네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인 척 한 것뿐이야. 너는 네가 그 말들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런 믿음은 말을 하기 전에 가져야지. 안 그래?

뭐 좋아.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야. 뛰어. 이제 뛰기만 하면 다 이해해줄께. 널 영원히 아름답게 이해해줄게. 이건 너처럼 말뿐인 게 아니야. 난 각오가 섰어. 네가 죽어주기만 한다면 그 정도 고통은 감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어서 너도 너 말을 지켜. 이제 너의 차례야."

한낮의 그러나 일요일의 거리는 묘한 나른함이 지배하고 있다. 다들 뭔가 눈이 풀리고, 무릎이 풀리고, 조금은 나사가 빠져있다. 바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들보다도 더 느린 걸음으로 그 들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 둔다. 조금은 거치적거리는 보행자로서, 대로를 걷는다. 방향은 서쪽이다.

눈이 마주친 도둑고양이는 나를 노려본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도망친다. 고양이가 도망간 모퉁이에는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근처 직장인들이 담배를 태우는 장소다. 희뿌연 냄새가 싫지 않다. 습기를 머금은 담배 냄새가 항상 그곳에는 떠다닌다. 그것은 독극물의 냄새이자 무엇인가가 불에 타서 없어지는 냄새다.

불에 탄 물체는 대부분의 경우 원상복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르면 아마도 그렇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는 이 길을 건너서 빌딩 숲 속의 좁은 골목들로 들어설 작정이다. 목적지가 없음에도 길을 잃을 수가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이 골목들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한다고?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너의 방식 같은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을 정신이 있다면 지금 네 꼴이나 다시 한번 봐보는 게 어때? 네 감정에 취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봤니? 그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욕망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게 악하든 선하든 세속적이든 신성하든 그딴 게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욕망이야."

이 빌딩들에 커다란 유리 덮개를 씌우면 어떨까? 그리고 그 덮개 바깥에는 표지판을 만드는 거다. '인간'이라는 이름 정도를 달면 어떨까? 다소 식상하고 뻔한 이름이지만 전시품들은 보통 그런 이름들을 달고는 하니까. 아마도 어떤 잘나신 예술가도, 어떤 대단한 박물관도 이보다 대단한 것들을 만들거나 전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대 빌딩' 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거대한 도시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평가해줄 인류가 탄생할 거다. 그들은 자칫하면 떨어져 죽을 수 있는 높은 탑을 세우고, 간단한 조작 한 번에 커다란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동차라는 것을 몰고 다니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살았음을 놀라워할지 모른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렇게도 살았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길은 다시 굽이굽이 이어져서 다시금 대로로 접어든다. 이 대로에는 일요일에 걸맞은, 그러나 대도시에 걸맞은 차량 통행량이 있다. 이제 나는 멈추어 선다. 그리고 180도 돌아선다. 정확히 제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