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이방인, 알베르 까뮈

읽고보고맛보고 2021. 4. 1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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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는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평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까뮈를 통하여 실존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1.

저는 이방인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금번에도 2번을 더 읽었습니다. 이정서 씨와 김화영 교수님의 번역이었죠. 저는 프랑스어에 대하여는 전혀 모릅니다. 까뮈의 프랑스어 원본에 대하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죠. 그래서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 있구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2.

저는 이 책에서 마지막 챕터를 가장 좋아합니다. 물론 해석은 누구에게나 다르겠지만, 저는 까뮈가 이 부분을 쓰기 위하여 이 책 전체를 썼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까뮈는 오직 이 마지막 챕터에서만 온전히 뫼르소에 대하여 적었습니다. 신부는 뫼르소의 얘기를 끌어내기 위한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이 마지막 챕터는 결국 무의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P137, 민음사)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갖지 않나요? 죽으면 완전히 죽어 없어진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건가요?"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P141, 민음사)

(* 새움의 번역은 많이 다릅니다. 이정서 씨는 오역에 대하여 많은 코멘트를 했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까뮈의 '시지프 신화'와 연장선 상에서는 민음사의 번역과 같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삶이 괴로워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P155, 새움)

"그러니까 전혀 당신은 희망이 없는 것이고 온통 죽는다는 생각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그리고 말을 쏟아냅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P145, 민음사)

(*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P164, 새움))

까뮈에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부조리와 무의미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인간이었습니다. 뫼르소는 그런 사람이었죠. 삶의 무의미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무의미를 정면으로 맞아들이는 것. 그리고 무의미한 삶을 스스로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에게 삶의 의미를 위탁한 삶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사형수에게 삶의 의미를,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찾아주고자 하는 신부에게 폭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뿐이니까요.

3.

뫼르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정서 씨는 해석에서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뫼르소라는 인물을 일반과 괴리된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까뮈가 어떤 식으로 뫼르소라는 인물을 해석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프랑스어 원문은 전혀 해석하지 못하니까요.

다만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인물이고, 결혼을 제안하는 여자에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이방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무의미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무의미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에게 스스로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가지지 않았으니까요. 시지프스가 돌을 굴려 올리듯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에서 이방인이며, 그렇기에 스스로의 운명에 대하여도 이방인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그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와 배심원과 증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고 변호했습니다.

4.

뫼르소는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에서 엄마를 생각합니다.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든 것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P147, 민음사)

그것들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P166, 새움)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P146, 민음사)

그 바람은 자신의 행로 위에서, 내가 살아 있을 때보다 현실적이랄 게 없는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 모든 것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P165, 새움)

죽음에 가까워진 시간이 되고, 마침내 해방되어 자신의 삶의 이방인이 된 어머니는 결국 의미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마침내 다시 살게 된 것이죠. 그리고 뫼르소는 죽음의 앞에서 무의미에 눈을 돌리지 않은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를 얻어냅니다.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죠. 결국 세계는 모두 닮았다는 것을 결국 차이도 중요함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진정 부조리의 인간으로서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다운 무관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다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사형 집행의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맞아주기를 바라게 될 뿐입니다. 증오의 함성으로 말입니다.